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퀴리 (문단 편집) === 대학과 결혼 === 마리 퀴리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먼저 프랑스로 가있던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 스크워도프스카(1865–1939, 결혼 이후 이름은 브로니스와바 드우스카)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브로니스와바는 내과의사로 어느 정도 성공한 내과의사이자 사업가인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 1855–1930. 정확히는 이 형부도 [[폴란드]]계 이민자 후예였다. 사업가다 보니 마당발이었는데 폴란드인들과 매우 친했고 [[폴란드어]]도 잘 했기에 아내나 처제 마리 퀴리에게도 매우 잘 대해주었다. 폴란드 독립에도 경제적인 후원을 해서 폴란드가 독립하고 나서 폴란드로 가서 사업을 크게 차리기도 했는데 심지어 폴란드 초대 대통령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와도 매우 친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동족인 폴란드인, 망명자들을 위한 폴란드어 살롱을 운영하면서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을 주선하기도 하고 독립 관련 운동에 돈도 후원했다. 아내와 프랑스 파리에서 1남 1녀를 얻었으나 둘 다 일찍 [[요절]]했다.]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언니와 형부는 마리 퀴리를 극진히 대접했으나, 마리 퀴리는 이런 과한 대접을 부담스럽게 여겨 하숙집을 구한 후 독립했는데, 가진 돈이 넉넉하지 못해서 저렴한 하숙집에서 생활비를 아끼며 지냈다. 그러나 이 하숙 생활 때문에 마리 퀴리는 난방이 잘 안 되는 방에서 추위에 시달리고 돈이 없다보니 음식조차 제대로 못 먹어 고생했다. 전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리를 공부하다 너무 힘들면 대수학을 공부하여 머리를 식혔다고 한다.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 어린이 위인전에서도 하루에 [[빵]] 한 조각과 [[당근]] 하나만 먹으며 공부했다고 묘사할 정도이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를 발견한 하숙집 주인이 빨리 [[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니와 형부는 경악했고, 곧바로 마리 퀴리는 언니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강제로 [[스테이크]]를 실컷 먹어야 했다...[* 우스개가 아니라 딸 에브가 쓴 '마담 퀴리'에서도 실제로 형부가 처제에게 필요한 약이라고 하더니만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는데 이때 마리 퀴리가 고기를 잔뜩 주문한 걸 정신없이 먹었다고 한다. 1981년 삼성당에서 낸 퀴리 부인 위인전 만화책에서는 우습게 나오는데 글귀로 실제로 '마리는 이렇게 고기를 약 대신 먹었다고 한다'라고 서술되었다.] 언니는 울면서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냐고 슬퍼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언니는 어머니와 언니 조피아가 병으로 [[요절]]하는 것을 보았으니 마리 퀴리도 죽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이 둘째 언니도 사실 그때 큰 언니와 같은 병에 걸렸었으나 언니와는 달리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내 동생이 쓰러졌으니 크게 걱정이 되는 건 당연지사.] 마리 퀴리도 언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사과했다. 다만 폐를 끼치기 싫다며 언니 집에 지내지 않고 다시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대신 이전과는 달리 언니와 형부가 지원해준 돈으로 좋은 하숙집을 구하고 전보다 여유롭게 지내면서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당시 35세의 노총각이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 이듬해인 1895년에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 뒤 방사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녀는 딸 두 명(이렌, 에브)이 있었는데 이렌이 태어난 후 마리 퀴리가 에브를 가지기 전에 한 번 임신한 적이 있었으나 유산했고 그 후 에브를 낳았다. 참고로 언니 브로니스와바는 내과의사로 병원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았지만, 사업가인 형부를 설득하여 마리의 연구에 많은 돈을 연구비로 보태줬기에 마리와 피에르의 연구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이 때문에 폴란드 독립 이후에 브로니스와바 드우스카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도 폴란드 정부에게 라듐 발견 공로자로 인정받아 치하장도 받고 폴란드 각종 국영사업권도 이어받아 큰 사업번영을 누렸다. 프랑스에서 마리 퀴리 라듐 연구소가 열린 뒤로 언니와 형부는 1925년에 [[바르샤바]]에 마리 퀴리 바르샤바 라듐 연구소를 설립했다. 여러 사정으로 연구소는 1932년에 개장했는데 남편이 병으로 죽고 나서 언니가 이 연구소장을 맡았다. 그녀도 마리의 딸과 친하게 지냈는데 위에 각주에서 서술되었듯이 브로니스와바는 딸 헬레나(Helena)를 1922년 30살로 잃었고 아들 야쿠프(Jakub)는 1903년 겨우 7살로 죽었기에 자손이 없었다.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했으나 가족이 없던 그녀는 남편이 죽고 나서 [[조카]]인 이렌과 에브를 친딸 같이 여기며 지냈으며, 마리 퀴리가 죽고 나서 이렌과 에브도 이모 브로니스와바를 엄마처럼 모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